* https://youtu.be/XyzSmG1dnrY
“이상한 소리를 하네….”
이상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처음 예상한 것에 비해 여행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는 꽤 좁아졌다. 형식상으로나마 타인과 삶을 엮은 것의 대가였다. 죽음이 증명되어야 했으니, 삶의 양식도 그만한 제한을 받았다. 결국 혼자 떠날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아서, 마릴린 헤슬러의 여행은 재건 중인 타인의 삶 근처를 떠도는 일이 되었다.
멋대로 관망하는 타인의 삶들은 이상하리만치 일관적인 향상성을 띠고 있었는데, 마릴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당연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지 못할 것들, 닥친 불행에 지쳐버린 삶들은 이미 세계 바깥에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어가기로 한 삶들은 매 순간 더 나은 곳에 닿았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미구엘 하이트만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 자신이 기대한 것보단 나은 곳에 닿으리라, 보다 즐거운 것들, 사랑하는 것들과 맞닥뜨리게 되리라고.
그의 주의를 끌지 못할 망상인 것을 알아 말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정말로 빠르게 흘렀다. 하이브에서의 3년이 느리고 지난하게 흘렀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자라 목덜미를 간질이는 통에 종종 성가셨고 타인이 남겼던 귓불의 화끈거림은 어느새 영구적인 상처가 되었다. 거울 속에서, 혹은 계절의 변화에서 지나간 시간의 길이를 체감할 때면 문득 염증이 들 때가 있었다. 결국 자신이 부유하고 있는 이 삶만이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셈이었다.
A는 B를 좋아했고, C는 B가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B는 두 사람 모두의 감정을 알았으나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몰두하지 않았다. B는 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에 더 집중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영화를 보았는데 그 풍경이 자신의 고향과 닮아있어 아주 그리워졌더라는 것. 그 풍경 속에서 사랑하던 이들이 아직도 생생하였기에 다음 여름엔 고향을 찾아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자리의 모두가 그곳에 더는 그가 사랑했던 풍경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지만, 세 사람은 결국 그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 중 누군가가 마릴린에게도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마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제법 아쉬운 티를 냈고 또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마릴린은 그들 세 사람의 관계처럼 자신이 이어질 수는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친절한 것이 전부였던 이 여행객의 이름조차 곧 잊게 될 것이고, 마릴린은 이름을 잊는 한은 없어도 그들을 떠올리지 않게 될 것이다. 삶은 매 순간 아주 가느다란 실들로 이어져 유예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순간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에나 의미를 두었느냐고 하면……
A가 문득 물었다.
“하긴 여행도 곧 끝이라고 했었지?”
“응, 돌아가야 하니까…”
돌아갈 곳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구엘 하이트만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시아 지부로 향하는 길에 마릴린은 남는 케이블을 찾아 꺼져있던 전화기의 충전을 부탁했다. 벌써 몇 년을 사용한 전화기는 조금만 방치해도 전원이 다 해 꺼지고는 했는데, 집을 떠날 때면 충전기를 챙기는 것을 잊는 통에 전원이 들어와 있는 때가 더 드물었다. 전원이 켜지자 그간 쌓인 연락들이 한 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걸쳐있는 삶에 중요한 연락이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개중 곱씹을 만큼 소중한 이름들은 충분히 있었다. 빠르게 목록들을 훑고, 답장을 미룬 손가락이 잠시 화면에 머무르다가 떨어졌다. 그래도 떠나온 지가 꽤 되었으니 연락을 해야 할까 싶다가도, 그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 곧 아무래도 좋아졌다. 사실 연락이래봤자 이번의 긴 외출에서도 결국 죽지 않았음을 시사할 뿐이라 그저 구차할 따름이기도 해서.
귀찮아져 케이블을 빼냈다. 15% 남짓이 충전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꺼질 것이다. 감상이 이어지기 전에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마릴린 야코블레프?” 유니온 출입 확인을 도와 드릴게요.
이곳을 꽤 오래 떠나있었음에도 몽골의 기온은 여전히 영하에 머물고 있었다. 지난 겨울이 버거웠는데도 또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았다는 것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가, 곧 찬 바람에 씻겨 흩어졌다. 가방 깊은 곳에서 꺼낸 열쇠가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경쾌하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집 안이 밖과 큰 차이 없이 춥더란 사실이었다. 정오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라 집엔 볕이 들어 환했으나, 마릴린은 습관처럼 벽을 더듬어 전등을 켰다. 텅 빈 거실이 보였다. 괜히 사람이 들어온 티를 내거나 닫힌 방문을 두드려 볼 것도 없이 마릴린은 집이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한동안 계속 비어있었는지도 몰랐다. 떠나있는 동안 비워두어야 하는 과일 바구니나 화병 따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없어 저의 것과는 달리 미구엘의 부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마릴린은 어쩐지 집이 비어있음을 기민하게 눈치 채고는 했다.
마릴린은 작은 짐 가방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에 오래 씻은 뒤에야 침대에 앉았다. 누울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어차피 잠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텅 빈 집을 자각한 때부터 그랬다. 가만히 앉아있던 마릴린이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가다가 곧 이어졌다.
- 응.
목소리를 듣자 뒤늦게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곧 무척 우스워졌다. 이러면서도 돌아올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마릴린은 속으로 자조했고,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였다. 이런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집에 왔는데 미구엘이 안 보이길래. 밖이야?”
- 응, 잠깐.
“이따 들어올 거면 같이 저녁 먹을까?”
- 그래. 시간은…
……
아무튼 전화를 끊고 약속된 저녁 시간까지, 마릴린은 꿈 없이 깊은 잠을 잤다.
마릴린은 어느 순간부터 미묘한 어긋남을 느꼈다. 그는 매 순간 이곳이 자신의 장소가 아님을 상기하면서도,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보다 편안함을 느꼈다. 미구엘 하이트만이 아니었다면 이런 형태의 유예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릴린 헤슬러가 언젠가 떠날 사람이기에 무가치함을 이해했다. 헤어짐은 아쉬울 것이라 하면서도 그가 뜻할 때에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가치 없는 상대에게 아끼는 이야기들, 내어주지 않는 것들엔 때때로 아쉬움이 끼어들 때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릴린이 떠날 것을 전제로 하였기에 유의미했다. “내가 보고 싶어지기도 할 것 같아?” “가끔 생각나겠지.”
떠날 것을 전제로 하여서도 무언가를 시작해선 안 되었다는 것을, 마릴린은 이 어긋남의 정체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입에 담을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어쩌면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삶은 더 나은 곳에 닿을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간직하게 될 가장 좋은 순간들은 그와 함께인 때이겠지만, 그는 다른 기억들로 그 모든 것을 덧씌우게 되리라. 한 1년 정도는 가끔씩 내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라. 길을 지나다 가판에 과일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거나 계절이 바뀌어 얇은 이불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하지만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도 줄어들게 되면, 그 이후에는…
아쉬움은 언젠가 잊힐 감정이었다.
잠에서 깨면 저물어가는 볕이 창문으로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이 계절, 이 시간의 중력은 질량이 커서 침대에 누운 몸을 무겁게 눌렀다. 마릴린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약속한 시간엔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을 갖추어 입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것이 익숙한 일처럼 느껴졌다. 돌아온 이상 그래도 한동안은 같은 일상이 이어질 것이다. 대개는 정확한 기약 없이 이야기된 동행이 이루어져 어디론가 함께 떠나거나, 또 저 홀로 떠나버리게 되기 이전에는.
그래도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또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았다. 망가져 창문이 닫히지 않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텅 빈 도로를 달리다가 과거에는 분명 멋진 곳이었을 절벽 위의 폐허에서 쉬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내내 무게가 없는 대화를 하고 또 기약 없는 계획을 만들다가, 어두운 밤에 더는 도로를 달릴 수 없어 길 한 켠에서 눈을 감으면 조금 전까지 마주했던 얼굴이 그대로 그려질 것 같았다. 잠에서 막 깨어 나른한 상태로 그런 것을 바라는 정도는 괜찮은 듯 느껴졌다.
“미구엘.”
변한 것 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
이상한 것들이 많았다.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제게 일어난 변화들, 자각하지 못한 새에 겪어버린 것들. 야코블레프로 불리는 일에도 익숙해졌다거나 또 그러기 위한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까지를 전부 포함했다. 그 외에도 아주 많이. 아쉬움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고 도리어 그의 곁을 돌아올 곳으로 생각하게 되거나, 또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전해지지 않음에 유치한 감정을 드러내어 버리게 되었다거나… 여분의 삶마저도 타인을 이유로 하여도 좋겠다는 방만이 그랬다.
그런 구차함을 드러낼 생각은 결코 없었다. 미구엘 하이트만은 무가치함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집요한 시선이 닿던 뺨이 간지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는데, 캐묻거나 내용을 추측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란 걸 알았다. 미구엘은 가지고 있는 언어 중에 아주 일부만을 정제하여 내보냈고, 가공의 과정 중에 대개의 진실은 가벼워지다 못해 사라지곤 했다. 마릴린은 지난 시간동안 그에게 닿는 법을 조금 익혔다. 그래서 미구엘 하이트만에게도 시간이 빠르게 흘러, 결국엔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가장 예기치 못한, 이상한 일이었다.
상기하였던 말을 다르게 수정해보자. 미구엘 하이트만이 결국에 저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를 쫓아와 연고라고는 없는 땅에서 우스운 흉내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구엘도 아마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기묘한 관계 위에 있었고, 서로에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마릴린은 주제 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정도의 염치가 있었고, 미구엘에게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를 처음으로 자각했을 때에 물러났어야 했다. 허나 그게 언제였는지, 무엇부터였는지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가 자신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들에 아쉬움을 느꼈을 때? 그것이 그대로 삭아서 사라지지 않고 쌓이고 있음을 알았을 때? 자각한 순간엔 이미 늦어있었다. 마릴린은 이미 미구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결국 미구엘 하이트만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바람이 차가운 만큼 맑았다. 머리카락이 닿아 뺨이 간지러운 것을 알고 마릴린이 조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들어, 눈이 마주쳤다. 시야 한 구석에서 가로등 빛이 뿌옇게 흩어졌다. 그런 말을 다 하다니, 이상한 일이야.
“…잊히게 될 것을 알잖니. 금방 더 나은 것들이 생길거야.”
마릴린 헤슬러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다 온전하게 쌓인 것에 예외의 가치를 매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차마 막지 못한 변화가 있었고,
“하지만 당장에 내가 필요할 것 같으면.”
마릴린은 결국 미구엘 하이트만의 변덕을 핑계로 삼아 숨고 싶은 마음이 뜻대로 하게 두었다.
“그러면 미구엘이 그렇게 생각할 동안에는 곁에 있을게.”
네가 원하는 동안에는, 네가 외롭지 않도록. 아주 잠시동안이라도 괜찮았다.
그는 이 관계의 비밀을 아주 많이 예측하고 있었다. 삶의 권태는 결국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허무를 공유하는 이들이 서로의 어딘가에 닿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 순간의 모든 일들이 무가치하게 지날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주 이상하고, 자각하지 못한 새에 놓쳐버릴 순간이리라.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뒤를 돌아보면 많은 것이 변해있을 것이다.
“추운데… 이제 갈까, 집에.”
마릴린은 이것이 아주 오래 잊고 지냈던 어떤 기대감임을, 천천히 더듬어 깨달았다. 그들은 결말이 단정되지 않은 삶이 나아가도록 지금 아쉬워져 보기로 했다.